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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운대

Haeundae Beach

 

오늘, 정상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였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정상과 비정상은 언뜻 보기에는 구별하기 쉬운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쉬운 것은 아니다. 정상과 비정상은 시대와 사회의 관점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우리는 이렇듯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하고 있지만 사실은 그 경계에서 매우 위험한 줄타기를 하고 있다.

 

아름다운 해변에 수많은 피서객들이 구름 같다.

우람한 근육질, 쭉쭉빵빵, 비키니, 선정적인 수영복 차림으로 활보하는 사람에 시선이 절로 돌아간다.

 

여름 해변은 이런 모습이 일반적인 곳이다.

시선을 어디로 보내야 할지 모르겠다.

보는 내 눈이 정상인가 비정상인가?

아니면 외면하는 내 눈이 정상인가 비정상인가?

 

내 눈은 돌아간다고 바쁜데, 머리는 자제하라지만

본능이 이성을 앞서는 이 상황이

정상인지 아닌지 스스로도 분간하기 어렵다.

 

손오공처럼 긴고아를 쓴 것도 아닌데

평소의 인격과 품격은 온데간데없이 쪼그라든다.

 

해운대는 부산은 물론 우리나라 해변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 이 상징성만으로 부산과 해변, 바다를 이야기 할 수 있고 그 안으로 빠져들 수 있다. 그 해변은 젊음과 열정, 아름다운 낭만이 넘치는 곳이다. 우리는 해변을 통해서 사랑과 여행을 먼저 떠올린다. 눈만 감고도 저 멀리서 들려오는 파도와 갈매기가 전하는 달콤한 속삭임을 들으려 한다. 하지만 우리는 아름다운 바다의 이면에 또다른 해변이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는지 모른다. 즉, 우리가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낭만과 상상의 감성을 경계로 또 다른 세상이 있다는 것이다.

 

이 작업은 해운대를 비롯한 부산의 해변과 그 주변의 비정상적인 모습에 중점을 두고 작업하였다. 즉, 우리사회는 광기와 욕망, 욕심, 희열, 두려움 등 다양하게 나타나는 불안한 표정으로 만연해 있다. 그러므로 비정상적인 모습을 통해서 우리의 현실을 생각해보고, 정상이 비정상을 지배하는 구조로 인해 발생하는 소외, 외면, 박탈, 갈등 등 사회의 비정상적인 면을 바라보는 것이다. 또한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이중적 태도와 정상이라고 하는 일방적 갑질 형태가 낳은 결과의 산물을 비춰보는 것이다. 흑백의 논리도 좋지만 그것은 언제까지나 건강한 사회를 위한 논리일 때 필요할 것이다. 그 흑백의 논리에 의해 희생되어지는 다른 한쪽에 대한 배려 또한 필요하다. 우리는 하나의 구성원이지 다른 존재가 아니다. 그 구성원을 이탈시키는 행위와 논리는 자기의 이익과 권리만을 쫓는 또 하나의 권력이란 일탈행위 일 수 있다. 따라서 사회에 전염병처럼 만연해 있는 비정상의 모습에 관심을 두면서 정상이라고 말하는 세상의 이면을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또한 이 작업으로 아름다운 낭만 뒤에 우리의 불편한 현실 즉, 광기와 욕망, 욕심, 두려움, 불안 등으로 가득한 요지경 같은 세상의 단면을 보여주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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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해설 : 김수우 / 시인

소비를 넘어 존재의 수평선을 향하다

 

 

광활한 물결은 그 자체로 묵시적 언어이다. 바다 앞에 서면 누구나 익숙하면서 동시에 낯선 질문을 받는 이유이다. 누구나 제 방식으로 익숙하게 또 낯설게 대답할 수밖에 없다. 김동진 작가는 몸을 보여준다. 몸들이 출렁인다. 몸을 가진 영혼들, 아니 영혼을 가진 몸들이 있다. 몸은 모래와 파도 위에서 절벽이 되기도 하고 통로가 되기도 한다. 중심이 되기도 모서리가 되기도 한다. 빛이 되고 그림자가 된다. 나뭇잎이 되었다가 흰 구름이 되면서 무수한 반짝임의 틈새를 만들기도 한다.

그리고 그 몸체들은 초고층 빌딩들로 둘러싸여 있다. 작가가 부딪친 몸의 유쾌한 순간들이 통증으로 다가오는 까닭이다. 몸의 세포는 아주 오래된 수평선으로 구성되어 있다. 수평선은 인간이 처음부터 꿈꾸어온 자유의 근원이었다. 빌딩이 암시하는 현대인의 수직적인 욕망은 그 수평선을 가로지르며 존재의 영역이었던 모험을 값싼 소비재로 만든다.

사진뿐 아니라 모든 예술은 결정적 순간에 어떤 경계를 보여준다. 그 경계는 아슬아슬하게 상징계를 관통하여 실재계를 슬쩍 비춘다. 그 찰나에서 우리 일상은 놀라 황망하기도 하고 보호색 입은 도마뱀처럼 움츠리기도 한다. 그러나 순간의 부름은 던져진 돌멩이처럼 긴 파문을 낳는다. 그리고 그 파장은 하나의 나선형 지하계단처럼 우리 앞에 심연을 만든다. 청동빛 깊은 나선계단에서 울리는 메아리를 작가는 우리 앞에 흑백으로 펼쳐놓는다. 영혼의 맨몸들은 어떻게 바다에 스미는가.

김동진 작가를 만난 적이 없다. 오로지 한 장 한 장의 사진으로만 작가를 읽어가는 일이 기대가 되면서도 어려웠다. 왜냐하면 사진의 모든 발언은 강력한 도전이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 속에서 태어난 해운대는 몸의 중력으로 가득했다. 바다는 근원을 묻지만, 현대인은 근원에 익숙하지 않다. 근원에 익숙하지 않는 현대인에게 ‘정체성’이란 정말 애매한 개념이다. 작가의 사진 속 몸의 실재들도 애매했다. 그 불투명과 애매함은 곧 통증이었다. 통증은 어디선가 투명한 진실이 긴 발톱을 내밀고 있음을 의미한다.

바다 앞에선 누구나 쉽게 벗고 쉽게 맨발이 된다. 제 몸뚱이를 항상 날것으로 내놓는 물결 때문일까. 옷이라는 중력을 벗으면서 원래 자기가 되었다고 착각한다. 벗는 방식도 살아온 방식만큼이나 비슷하지만 다양하다. 닮고 싶지도 않고 그렇다고 남다르고 싶지도 않은 현대인은 자기분열로 인한 갈등의 몸을 가지고 있다. 그 몸을 던지기도, 눕히기도 하면서 모래알처럼 데리고 놀다가 날아오르듯 물결 속으로 뛰어든다. 몸이 근원적인 자연일까. 벗은 몸이 자신의 본래일까. 문제는 그것이다.

하지만 해운대의 가벼움은 갑옷처럼 무겁다. 허위를 벗는 것 같지만 거대한 소비 시스템을 입고 작동하고 있다. 해운대는 아름다운 자연일까. 거대한 인위일까. 과잉과 결핍의 세포는 거대한 나태함과 안일함으로 진화하면서 사실과 허구를 섞는다. 거기서 우리는 소비되고 있는 중이다. 그 화합에서 생성되는 충동은 내가 세상에 살아있음을 확인해주는 당위가 된다. 하지만 얼마나 많은 당위들이 우리를 속여 왔는가.

고민의 실체는 인간이 영혼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 땅은 영혼의 더듬이를 느끼는 사람과 전혀 못 느끼는 사람, 두 부류로 구성되어 있다. 영혼을 느끼는 사람들은 욕망이라는 중력 속에서 몸이 얼마나 고단한지 이해한다. 옷의 허위를 벗으면서 존재를 깨닫는 것이다. 못 느끼는 사람은 그저 자기 자신을 소비하고, 자신이 사랑하는 모든 가치를 소비재로 타락시킨다.

우리는 바다를 소비한다. 김동진 작가의 사진들 속에 통증이 번져나는 이유이다. 작품 속의 몸들은 바다를 소비하는 방식을 그대로 보여준다. 거대한 빌딩들에 둘러싸인 해운대는 욕망을 발산하는 자본주의의 극단적인 물질화를 온몸으로 드러낸다. 어떤 순수도 어떤 유쾌함도 존재 자체로 스며들지 못하는 해변은 계속 동물화 또는 사물화되고 있다. 무한한 환상과 착시들이 울퉁불퉁 우거져 있는 소비 속에서 우리는 정체 모를 불안을 느낀다.

개인들의 환상은 에로티시즘적 욕망과 교차되면서 과잉된 쾌락을 낳는다. 유리창으로 가득한 초고층들은 해운대의 현재를 극명하게 표출한다. 스스로 물화를 선택한 인간들은 소비와 쾌락의 패턴에 갇혀 버렸다. 아무 것도 걸치지 않은 맨몸인데도 자본에 의해 소비되고 있는 영혼들이다. 소비는 언제나 근원적인 결핍으로 이어져 있다. 우리 몸에 숭숭 뚫려있는 영원히 채워지지 않을 어떤 구멍들. 가늠할 수 없는 그 허위는 기실 자기의 것이 아니라, 타자의 것이다.

욕망의 타자성으로 가득한 해변은 강렬한 햇빛과 서로 간의 애정 속에서도 쓸쓸하다. 자연의 법칙을 잃어버린 해변에서 사람은 바다의 언어를 읽지 못한다. 수평선 그 너머를 응시하지 못한다. 몸은 욕망의 미끼가 된다. 타자의 욕망 속에 생성된 감수성은 존재의 욕구가 아니라 도구화된 관계를 양산한다. 소비사회가 만들어낸 결핍들이 모래성 같은 엉성한 행복을 짓는 것이다. 우리는 정말 우리다운가. 해운대는 정말 해운대다운가. 의심할 수밖에 없다.

우리 자신을 그저 소비재로 만들고 말 것인가. 난무하는 외침이 삶을 향한 환호인지, 그저 비명인지를 구별할 수 있을까. 날아가려는 날갯짓이 나오는 새로운 자유일 수 있을까. 우주를 울리는 교감일 수 있을까. 생명감이란 한순간이 아닌 지속적인, 내게 필요한, 아니 모두에게 필요한, 진정 가난한 그 무엇이다. 사진 속 어조와 리듬이 우리에게 통증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작가가 아주 작은 틈, 실재의 빛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내 영혼은 중력을 제대로 벗고 있는가. 옷을 벗는 것은 허위를 벗은 것이 아니다. 중력이란 내가 집착하고 있는, 나를 끌고가는 욕망의 세계이다. 모래, 바람, 햇빛이 함께 우리에게 요청한다. 내 몸이 모래로 되어 있다는 것, 내 몸이 거대한 소금물과 바람과 햇빛으로 되어 있다는 것을 자각하라. 내가 어디에서 왔던가. 수평선은 우리에게 원초적인 고뇌를 다시 부탁한다.

우리 그림자조차, 지닌 소품들조차, 어떤 사소한 사건조차 존재가 되어야 한다. 그때 우리는 누림, 풀림, 나눔이라는 소통의 문장들을 쓸 수 있다. 실재계를 엿보는 상징계의 구멍들, 그 기표의 그물망은 무한한 착시로 되어 있지만, 그 속에서 우리는 어떤 슬픔을 포착한다. 말로 설명 불가능한 어떤 심연을 본다. 없는데도 물컹물컹 잡히는, 뭔가가 잡히는데도 결코 보이지 않는, 정상적인 기표로는 표현되지 않는, 어떤 아우성인데도 들리지 않는 그 장소를 사진가는 찍는다. 그래서 사진은 어렵다. 보이는 풍경 속에서 보이지는 않는 어떤 실재를 발견한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그 불완전한 엉김들은 언제나 낯설고 아플 수밖에 없다.

해운대 여름바다의 일상적인 장면 속에 배치된 김동진 작가의 다층적인 응답은 우리에게 당부가 된다. 영혼의 필요, 가난한 근원을 자각하지 못하면 나 자신조차도 물질사회의 굴절된 소비에 불과하다. 이 두려움이 작가를 바다에 몰입하게 하게하고, 하나하나 의문하게 했으리라. 몇 겹으로 된 작가의 응시는 그렇게 우리에게 질문한다. 너는 바다 앞에 하나의 존재로 거하는가. 너의 몸은 하나의 소비로 낭비되는가. 그렇게 사진의 언어는 사유적 행동이 되면서 철학적 숙제를 내던진다.

우리는 존재하기 위하여 바다에 간다. 나에게 존재감을 선물하고자, 모든 삶에 선물이 되고자 영혼은 옷을 벗는다. 거기 바다가 있다. 그래서 믿게 된다. 우리가 바다를 초대한 것이 아니라, 바다가 나를 초대한 것임을 아는 순간, 일 대 일로 마주치는 우주 전체를 감지한다. 나는 바다를 소비했지만 바다는 나를 소비하지 않았다. 모든 물음을 끌고와 바다는 나를 존재하게 만든다. 광막한 수평과 무한한 심층을 가지고 바다는 매일 새롭게 당도한다. 그 심오함은 우리가 결코 소비재로 누릴 수 없는 모성이다.

바다는 끊임없는 물결로 밀려온다. 시시로 실핏줄 속으로 스며들어 나의 본래를 출산한다.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모든 슬픔이 대상화되어버린 현실, 내가 욕망하는 것으로부터, 나를 욕망하는 것으로부터 존재를 지킬 수 있을까. 눈을 가늘게 뜨고, 나와 타자들 사이의 모호한 경계를 오래 바라볼 수밖에 없다. 보이지 않는 광활한 침묵과 아우성을 간파해낼 수밖에 없다. 소비로 통제받는, 소비로 구속받는 저 허위의 몸짓들을 그래도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희망이며 동시에 우리의 능력인 걸까.

한여름 해운대 백사장에 나뒹구는 무수한 동문서답 속에 우리는 멈춘다. 바다는 오늘도 우리에게 고뇌하는 별이 되는 법을 설명한다. 오래오래, 거듭거듭. 저 파도들. 저 약속들. 저 수평선의 영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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